여권 정치인들이 그에게 가지고 있는 ‘미안함과 기대감’
바닥 조직을 일으켜 세운 17년 대선과 18년 지선
노무현 대통령 배려로 3선 후 배신한 조경태
이상호 더불어민주당 전 부산사하을위원장이 정치를 하려는 목표는 조경태를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상호가 조경태를 이겨서 그를 퇴출시키는 것이다.
조경태 의원의 지역구 발판은 탄탄하다 못해 강철처럼 단단하다. 민주당에서 3선을 하고 선거 직전 새누리당으로 갈아탄 뒤에 치러진 2016년 총선에서 그는 자그마치 59.7%의 득표율로 4선에 올랐다. 그가 험지 중의 험지였던 부산에서 민주당 깃발로 3선을 이룬 것은 평가해줄 만하지만, 그 지역기반은 대부분 노무현 대통령의 지극한 관심과 배려로 이룬 것들이었다.
부산지하철 1호선이 사하역을 지나 당리-하단-신평 구간이 곡선으로 들어가고 다대포까지 연장된 것이 오로지 조경태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였다는 것은 부산 사하을 지역구민이라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특히 다대포 연장은 예타조사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던 사업이었다. 지금도 사하구민들은 부산 지하철 1호선을 ‘조경태 지하철’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가 컸던 것이다.
그것을 배신하고 당내 입지가 좁아지자 새누리당으로 갈아타고, 더 나아가 민주당에 있을 때나 새누리당으로 옮긴 뒤나 문재인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있는 조경태를 이쯤에서 누군가는 보내줘야 한다. 그 역할을 이상호 위원장이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여권 정치인들이 그에게 가지고 있는 ‘미안함과 기대감’
지난 12월 23일 그의 저서 <한다면 한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두관, 송영길, 진선미 의원과 함께 최인호, 김영춘, 박재호, 윤준호, 김해영, 전재수 의원 등 부산 지역구 의원 전원이 참석했다. 지역 언론은 “이상호의 여권 내 입지를 부각하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좁은 해석이다. 그를 바라보는 민주당 중앙정치인들의 마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미안함과 기대감’이다.
“여태도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습니다. 노 대통령님 돌아가시고 크게 좌절하고 낙담한 그는, 노 대통령님 선거운동 하던 그 열정과 패기로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에 또 한 번 나섰습니다. 그때 염치없지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게 바로 저입니다.”
<한다면 한다>에 수록된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추천사 중 한 대목이다. 왜 염치가 없었을까? 그는 매번 선거 때마다 혁혁한 공을 세워왔지만 그 공을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온갖 구설에 휘말려왔다. 누가 나서서 감싸주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가 했던 역할은 주로 공개하기 어려운 핵심적이고 비밀스러운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양정철 원장의 회고는 아래와 같이 이어진다.
“저나 흔히 말하는 친노 그룹이 야속할 법도 한데, 그는 군말 없이 2012, 2017 두 번의 대선 때 정말 헌신적이고 치열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남들 모르게 보이지 않는 음지에서 그가 열심히 뛰었던 활약을 생각하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그는 눈물과 땀으로 두 분 대통령을 만들었습니다.”
노무현을 잇는 수많은 노무현들
노무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 후 그는 “수많은 노무현이 노무현을 이어가야 한다. 나도 그 중 하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정치계에서 나름 유명인사였던 그를 이명박 정부는 그냥 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버스회사에서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혐의로 입건을 하더니 아무리 탈탈 털어도 뭐가 나오지 않자 ‘유사사무실 설치’로 엮어 벌금 200만원을 맞게 만든다. 이게 그의 두 번째 선거법 위반 전과다.
첫 번째 선거법 위반은 ‘희망돼지저금통’ 운동이었다. 선관위는 처음 ‘소액 모금운동’으로 장려하기까지 하다가 이 사업이 노무현 후보 선거운동의 상징이 되자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몰았다. 그러나 법원은 희망돼지저금통을 ‘선거법상 허용되지 않은 상징물’로 간주해 선거법 위반으로 판정했다. 그 책임자로 이상호 위원장을 처벌한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이상호 위원장은 캠프의 요청으로 현장에 투입됐다. 아쉽게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를 다시 불러일으킨 것은 세월호 사건이었다. 박근혜 정권을 도저히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2016년 총선을 목표로 전국의 국회의원 캠프를 돌아다니며 선거 특강을 했다. 스스로는 출마할 수 없는 선거였다.
가장 먼저 요청한 의원은 박영선 의원이었다. 이후 40여 차례 특강이 이어졌다. 2016년 총선에 이르러 특정 지역구를 맡아 선거기획에 들어갔다. 그것이 오세훈이 정세균 의원에게 도전했던 종로와 부산·경남의 8개 지역구였다. 기획·홍보·조직 등 그의 노하우가 모두 투입됐다. 정세균 의원과 부산 5개 지역, 그리고 경남의 김경수 의원 등이 그의 지원으로 당선됐다.
개표가 진행되는 도중 부산 5석이 유력해지자 문재인 당시 전 대표가 이상호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미키 씨, 보고 있어요? 퍼펙트!! 퍼펙트!!"
바닥 조직을 일으켜 세운 17년 대선과 18년 지선
2017년 대선부터는 조직기획실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우선 호남 경선 50%를 목표로 호남 조직을 다졌다. 2002년 이후 그와 오랜 인연을 맺고 있던 바닥의 조직이 그를 통해 되살아났다. 본선에서도 공중전에 능한 문재인 캠프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바닥 조직의 활동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그의 역할은 지대했다. 압도적인 전국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경남 지역은 그 지지율을 실제 표로 엮어낼 만한 조직이 전무했다. 민주당에게는 풀 하나 나지 않는 황무지였다. 그는 경남지역에 상주하면서 지지자들을 찾아내 그들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어 나갔다.
그가 경남의 지역조직을 확대시킨 방법은 ‘민원해결사’였다. 경남 지역에서는 민주당을 통해 민원을 해결해본 역사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역 지지자들에게 민원을 찾아 나서게 했다. 그렇게 수집된 민원은 그를 통해 바로바로 해결됐다. 경남도민들에게 ‘집권당의 힘과 효용감’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결과 경남 동부와 남부의 기초자치단체장을 민주당이 석권할 수 있었다.
지역구민을 감동시킨 ‘민원해결사’
지금 부산 사하을 지역에서 그가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게 한 것도 ‘민원해결사’였다. 그는 2019년 신년 인사 현수막에 "올 한 해는 언제든 전화주세요"라며 그의 전화번호를 공개했다. 그의 전화는 지금도 하루 종일 불이 난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해결할 수 있는 민원은 바로 해결했다. 빠르게는 문자를 받은 지 한 시간 만에 해결해준 것도 있다. 문자를 보낸 지역구민은 “‘총알 배송’이라는 것은 봤어도 ‘총알 민원’은 처음 본다”며 감격해 했다.
‘민원해결사’도 중요하지만, 그가 전화번호를 공개하여 지역구민의 전화를 받는 것은 유권자의 ‘자발적인 전화번호’를 수집하는 선거기법의 측면도 있다. 선거에서는 문자 하나하나가 곧 표로 이어진다. 그러나 자발적인 전화번호를 수집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후보자들의 문자를 받고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냐”며 불쾌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스마트폰에는 유권자의 자발적인 전화번호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모인다. 문자를 보내면 반가워하면 반가워했지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후보자들은 이 방법을 알아도 따라 할 수 없다. 하루 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고 민원이 있으면 바로바로 해결해주는 것은 하겠다고 해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이력을 말해주는 ‘4개의 전과’
그의 전과가 화제가 되고 있다. 그의 예비후보자 등록서류에는 모두 7건의 전과가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음주운전 등 3건은 개인적인 것으로 그의 부족함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공직선거 후보자 검증 기준에 있는 ‘10년 내 2회 이상 음주운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2건의 음주 운전 중 한 건은 15년 전인 2004년의 일이다.
그 외 4 건 중 선거법 위반 2건은 희망돼지저금통과 이해할 수 없는 표적수사와 먼지떨이 수사에 의한 것이었다. 나머지 2건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한 건은 2004년 탄핵반대 촛불집회를 주도했다는 혐의였다. 그는 처음에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탄핵안에 대한 기류가 불리해지자 ‘국민을 협박하지 말라’는 카페를 만들어 순식간에 10만 명의 회원을 모으고 탄핵안 가결에 대비했다.
탄핵안이 가결되자마자 거대한 집회가 구성됐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국민운동본부’에 주관을 넘기고 자원봉사를 뛰었다. 당시 모든 노사모 회원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집회를 도왔다. 그런데 경찰은 느닷없이 그를 ‘집회 주동자’로 지목해 그를 검거했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때는 대선에서 이기고 총선에서 이겨도 우리는 여전히 ‘야당’이며 ‘소수파’였다.
2005년 독립기념관에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일보 윤전기가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아세(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과 함께 ‘국민의 힘’을 이끌며 ‘조선일보 윤전기 철거 운동’을 주동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선일보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는데 조갑제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쫓아가 삿대질을 해댔다. 시비가 크게 벌어졌다. 그 바람에 이상호 위원장은 집시법 위반 혐의로 엮이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