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청원 인권위 공문’... 쓸 데 없이 말 만들고 일 키우는 언론들
청원의 단순 전달을 '진정서 제출'로 보도한 언론들 인권단체 "청와대 지시, 인권위 독립성 해쳐" 반발 인권위 "청와대 민원 이송은 통상적 절차"
‘청원의 허브(Hub)’ 역할을 하는 청와대 청원
청와대가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수사 과정에서 인권 침해가 발생한 데 따른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를 촉구한다’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전달한 것을 놓고 또 한 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 일의 자초지종을 따지는 것은 청원의 내용을 다시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해당 청원의 내용은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를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즉 국가인권위원회에 보내야 할 청원을 청와대 청원에 올린 것이다.
청와대는 청원 내용 자체가 국가인권위원회로 가야하는 것이고, 조사를 할지 말지, 답변을 할지 말지 등에 대한 모든 판단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 내용을 국가인권위원회로 보낸 것이다. 이것이 7일의 일이다.
그런데 8일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상세한 답변을 보내왔다. 청와대는 그 내용을 토대로 답변을 작성하여 9일에 청원 답변을 녹화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보내온 답변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다.
청와대가 한 것은 인권위로 갔어야 할 청원을 인권위에 전달한 것이며, 이에 대해 인권위가 보내온 상세한 안내를 다시 국민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인권위 답변의 골자는 “해당 청원 내용이 인권 침해에 관한 사안으로 판단되면 조사에 착수할 수 있고, 익명 진정의 경우 사건을 각하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실명으로 진정을 접수해야 조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청원을 올렸던 청원인은 이 답변에 따라 인권위에 연락해 진정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 인권위에 직접 진정할 준비를 하고 있다. 청와대를 통한 인권위의 안내가 청원인에게 제대로 잘 전달된 것이다.
청와대 청원에는 이렇듯 청와대나 행정부가 아닌 다른 기관에서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한 청원이 다수 들어온다. 국민들의 광범위한 청원에 대한 허브(Hub)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위에 진정해야 할 내용인 것을 알면서도 그 절차를 잘 모르거나 어떤 이유로 망설여질 경우 아주 쉽게 청와대 청원에 올린다. 이 경우 청와대는 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인권위에 진정할 내용을 청와대 청원에 올리는 것을 결코 나쁘다거나 잘못됐다고 할 수 없으며, 청와대가 이런 청원을 해당 기관으로 전달하고 보내는 것 역시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서실장 명의 공문 송부‘에 꽂힌 언론들
그런데 이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이상했다. 청와대를 통해 인권위가 밝힌 내용이 아닌 “청와대가 인권위에 공문을 보냈다”거나 “진정서를 제출했다”거나 심지어 “검찰을 압박했다”는 내용을 제목으로 올렸다. 도대체 왜 이랬을까?
청와대 답변에 있는 “대통령비서실장 명의로 국가인권위에 공문을 송부했다”는 말 때문이다. 할 말이 있거나 알릴 일이 있을 때 공문으로 보내는 것은 공적 기관들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전화로 하거나 만나서 말로 하는 것은 사소한 것이거나 뭔가 비밀스러운 대화가 필요할 때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소통은 ‘공문’으로 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그런데 언론들은 이것을 ‘정치적인 메시지’로 해석한 것이다. “해석했다”는 것은 다분히 호의적인 표현이고 사실은 “몰아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비서실장 명의로 송부했다”는 말에 무게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대외적으로 발송하는 모든 공문은 비서실장 명의로 발송된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제목에서 강조하는 부분이 달랐다. “조사 가능 여부를 검토할 수 있으며 실명 접수해야”라는 인권위 답변을 중심으로 제목을 작성한 매체는 ▲YTN ▲머니투데이 ▲아주경제 ▲이데일리 ▲뉴스토마토 ▲파이낸셜뉴스 ▲데일리한국 ▲이투데이 ▲뉴스핌 ▲위키트리 등 10개 매체였다.
인권위에 ‘송부’ 혹은 ‘전달’ 등으로 단순 전달 내용을 제목에 알린 매체는 ▲한겨레 ▲KBS ▲뉴스1 ▲JTBC 등 모두 24개였고, ‘공문’이라는 말을 강조한 매체는 ▲국민일보 ▲한국일보 ▲미디어오늘 등 23개 매체였다.
단순한 전달임에도 불구하고 ‘공문’이라는 부분을 강조해 청와대에서 뭔가 ‘공식적인 행동’을 한 것처럼 강조한 것은 어쨌든 청와대에서 “비서실장 명의로 공문 송부”라고 말을 했으므로 그럴 수 있는 일이다.
한 발 더 나간 ‘진정서 제출’ 오보
그러나 많은 매체들이 청와대가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거나 진정을 했다는 식으로 제목을 달았다. 이 기사들은 제목만 그렇게 쓴 게 아니라 본문에도 청와대가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쓰고 있다. 이것은 명백하게 사실과 다른 의도적 오보다. 답변 내용 어디를 봐도 그렇게 '오해'하거나 '오독'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이 오보의 출발은 연합뉴스였다. 연합뉴스를 따라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오보를 낸 매체는 모두 25개였다.
‘진정’은 아니지만 ‘제출’, ‘접수’, ‘조사요청’ 등으로 역시 사실과 다르게 보도한 매체는 ▲조선일보 ▲세계일보 ▲일간투데이 ▲노컷뉴스 ▲미디어펜 ▲UPI뉴스 등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검찰 압박”으로 보도한 매체도 있다.
▲‘檢 조국 수사는 인권 침해’ 국민청원… 靑, 인권위 진정서… 수사 압박 논란 문화일보
▲청와대, "검찰, 조국 수사하며 인권 침해" 국민청원, 인권위 송부...검찰 압박 강도 높여 전자신문
▲靑, 인권위에 ‘조국 수사 인권침해 조사’ 청원 전달…검찰 압박 논란 동아일보
▲여론은 윤석열 지지하는데··· 靑 "조국 인권침해 조사" 요구하며 검찰 압박 뉴데일리
▲靑 “인권위, 조국 수사 인권침해 조사해달라”…檢 압박 논란 동아일보
이에 청와대는 "오늘(13일) 국민청원 답변과 관련 ‘청와대, 인권위에 진정서 제출’이라는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면서 "청와대는 해당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에 국민청원에 접수된 내용을 전달한 것으로 청와대가 인권위에 진정(국가인권위원회법 제30조)을 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고 해명했다.
이 해명에도 불구하고 14일로 들어와 언론의 보도는 더욱 사나워졌다. “청원 앞세워 인권위를 압박한다”는 둥(조선일보), “인권침해 진정이라니 뭐 하자는 건가”(국민일보)라는 둥 한 마디로 난리가 아니었다.
▲靑 '조국 인권침해한 검찰 조사' 청원 앞세워 인권위 압박 조선일보
▲[사설] 조국 수사가 인권 침해라는 진정서 낸 靑, 뭐하자는 건가 국민일보
▲[사설] “조국 일가 인권침해” 인권위 진정, 즉각 철회해야 중앙일보
▲<사설>조국 不法 감싸는 靑, 수사팀에 인권침해 누명도 씌우나 문화일보
▲조국수사팀 ‘인권침해’ 고발 당할수도 동아일보
▲靑이 조사 의뢰한 날… 조국 옹호 교수, 인권위원 취임 조선일보
▲청와대 "조국 인권침해 관련 자료 송부" 인권위 조사 '우회 요청' MBN
▲국민청원 빌미로 '조국수호' 나선 靑 데일리안
▲청와대-검찰 ‘조국 관련 수사 인권침해’ 놓고 재격돌 국제신문
▲靑 비서실장 명의 '조국가족 인권침해 조사' 인권위에 진정서 경북일보
인권단체의 반발과 인권위의 해명
그러자 인권단체들이 즉각 반응했다. 한 인권운동가는 14일 페이스북에 “청와대가 인권위에 무언가 조사하라거나 조사하지 말라는 것, 누가 봐도 명백한 인권위 독립성 침해”이며 “‘전달’조차도 명백한 지시적 성격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15일에는 인권운동사랑방ㆍ다산인권센터ㆍ광주인권지기활짝 등 15개 단체는 “인권위는 청와대가 조사를 지시하는 하부 행정기관이 아니다. 인권위에 국민 청원을 전달하는 공문이 발송된 자체만으로 인권위의 독립성이 침해된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와대에서 민원이 이송되는 것은 통상적인 절차”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인권위는 “설립 후 대통령비서실에서 이첩된 민원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700여 건이고 국민신문고를 통해 이송된 민원은 6만 건에 달한다”고 밝히고 이에 대한 근거로 “행정기관의 장은 접수한 민원이 다른 행정기관의 소관인 경우 접수된 민원문서를 지체 없이 소관기관에 이송해야 한다”고 규정한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 제16조(민원문서의 이송)를 제시했다.
또한 "국민들이 대통령이면 다 해결해 줄 것 같다는 믿음으로 대통령실에 보내는 민원이 있다"며 "인권전담기구는 인권위이기 때문에 인권과 관련한 민원들이 인권위로 이송되는 것은 통상적인 절차"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3조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과 독립성 등에 관한 조항에 따라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국민청원 청구와 관련한 진정이 제출될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따라 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공문 인권위 반송 해프닝
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청와대 공문 인권위 반송 해프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인권위는 14일 “청와대가 13일 오후 공문 송부가 ‘착오’라고 알려와 당일 공문을 반송했다”고 14일 밝혔다.
‘인권위 조사 청원’에 대해 청와대가 답변한 과정은 7일 청와대가 청원 내용을 인권위에 알리고, 인권위는 8일 이에 답변을 보냈고, 청와대가 이 답변을 토대로 청원에 답변한 것이다. 문제가 된 ‘반송’ 건은 이 과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청와대는 자체 자료와 인권위 답변을 토대로 답변서를 작성해 9일 답변 영상을 제작한 뒤 실무자가 행정상 착오로 최초 7일에 발송한 공문과 유사한 내용의 공문을 다시 발송했다. 그 직후 착오를 알아차린 실무자는 즉시 인권위에 연락해 발송한 공문을 폐기해줄 것을 요청하고 양해를 얻었다.
그 뒤 인권위는 보다 확실한 행정 처리를 위해 13일 청와대에 “폐기 요청 공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해 청와대가 “9일자 공문이 착오로 송부된 것이므로 폐기를 요청한다”는 내용을 공문을 다시 보냈다. 인권위는 이 공문에 따라 ‘반송’ 절차를 밟고 이를 언론에 알린 것이다.
언론은 관련 사실들을 마구 뒤죽박죽 섞어서 이것이 마치 청와대가 인권위에 공문을 보낸 것이 무슨 큰 문제가 있어서 인권위가 이에 반발하여 공문을 ‘반송’한 것처럼 보도했지만, 실상은 매우 단순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