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바보 아냐?

2019-12-01     고일석
"199개 법안 몽땅 필리버스터"를 선언하고 있는 나경원/News1

 

국민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린 “199개 법안 몽땅 필리버스터”

나경원 자한당 원내대표는 본회의가 예정되어 있던 11월 29일(금) 오후 3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 본회의에 상정된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이 말 한 마디는 모든 국민들을 충격의 도가니로 빠뜨려 버렸다.

평소에는 본회의에서 무슨 법안이 처리되는지, 몇 개의 법안이 통과되는지 크게 관심을 끌기 어렵다. 그러나 이 날은 장장 11개월 동안의 패스트트랙을 거쳐온 유치원 3법이 처리되는 날이었고, 민식이법을 비롯한 어린이안전 관련 법안들이 통과되는 날이며, 그동안 자한당의 상습적 보이콧으로 몇 년 째 밀려있던 중요 민생·경제 법안들이 그나마 200개 가까이 통과되는 날이라 국민들은 “그래도 한 끼 밥값은 하네”라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날이었다.

그런데 그걸 “통째로 다 필리버스터로 처리를 저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건 뭐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밀려 있는 2만 여 건의 계류 법안들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도 꼭 필요한 것들을 선별해 여야 합의도 다 끝낸 법안들을 통째로 저지한다는 게 무슨 말인가.

그녀는 이런 이해난망의 선언에 엄청난 역풍이 일어나자 “민식이법, 해인이법,각종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하자고 제안했다”고 둘러댔고, 자한당 대변인 “199개 법안 중 5개 법안에 대해서만 필리버스터를 보장해주면 나머지 민생법안은 다 처리하겠다는 한국당 제안을 민주당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또 한 번 둘러댔다.

그러나 나경원은 3시 기자회견에서 “모든 법안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뒤늦게 아무리 둘러대 봐야 말만 꼬이고 더 구차한 변명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교통사고 피해 어린이 학부모들이 나경원 원내대표의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다./News1

 

선거법, 유치원3법, 그리고 똥볼 욕구

첫 번째는 패스트트랙으로 넘어 온 선거법 개정안의 상정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기자회견에서 “선거법을 상정하지 않는 조건이라면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법안에 앞서서 민식이법 등에 대해 먼저 상정해서 이 부분에 대해 통과시켜줄 것을 제안한다”고 얘기했다.

자한당은 필리버스터 결정에 앞서 의안과에 문의해 “필리버스터를 개별 안건마다 모두 신청할 수 있다”는 답변을 얻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론적으로라면 199건을 모두 필리버스터를 걸면 20대 국회 임기 마지막 날인 5월 29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진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장을 협박한 것이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여부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어쨌든 의장으로서는 대단히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골치 아픈 꼴 당하지 않으려면 이번 회기 내에 선거법을 상정하지 말라고 윽박지른 것이다.

두 번째는 그들이 진짜로 저지하고 싶은 법안이 뭔지 숨기고 싶었던 것이다. 자한당 대변인이 얘기한 ‘5개 법안’이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지 모르지만 그 중 세 개가 유치원 3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처음부터 비쟁점 법안들, 민생·경제 법안들을 먼저 처리하고 5개든 몇 개든 해당 법안들에 대해서만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면 아무 문제없이 그들의 필리버스터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유치원 3법을 저지하겠다고 나섰을 때 퍼부어질 비난이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것저것 안 가리고 "199개 모두 다!!”라고 지른 것이다.

솔직하게 처음부터 “유치원 3법을 포함한 몇 개의 법안에 대해서 필리버스터를 신청하겠다”고 했으면 그 정도 만큼만 욕을 들었으면 될 일이었다. 또한 만사를 제쳐놓고 국회에서 법안 통과를 지켜보려던 희생 어린이 부모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일도 없었고 국민들에게 분노와 충격을 던져줄 일도 없었다.

세 번째는 황교안 대표의 단식이 나름 성과를 거두자 뭔가 센 걸 해야 한다는 강박(强拍) 때문이다. 황 대표의 단식은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의 효과를 반감시켰고, 당내 구심력을 강화시켰으며, 보수통합의 상대방들로 하여금 약세로 돌아서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모두 알다시피 황교안 대표가 취임한 이래 황교안이 똥볼을 차면, 나경원은 더 센 똥볼을 차고, 그러면 황교안은 더더욱 센 똥볼을 차대며, 누가 더 세게 똥볼을 차나 피튀기는 경쟁을 벌여온 것이 지금까지 자한당 투톱의 내력이었다. 황교안이 여러 가지로 특이한 단식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동안 절치부심 “빨리 더 센 똥볼을 차야지”라며 다짐을 하다가 “199개 법안 모두 필리버스터!!”를 외치게 된 것이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모든 똥볼을 압도하는 어마무시한 똥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단식 중인 황교안과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나경원. "대표님, 얼른 일어나세요. 그래야 제가 똥볼을 차죠."/News1

 

나경원 덕에 빨라질 선거법·공수처법 처리

그 바람에 자한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의 선거법 합의를 촉진시키는 결과가 됐다. 지역구 225석, 비례 75석을 내용으로 하는 현재의 개정안은 통과를 장담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기존 개정안 상정에 맞추어 여야 합의, 혹은 여+야4당 합의를 통해 수정안을 제출해야 한다.

또한 자한당의 필리버스터를 막을 수는 없다. 법안 처리를 위해서 본회의는 언제라도 반드시 개의해야 하며 그러면 자동으로 자한당의 필리버스터가 시작된다. 자한당이 선거법 개정안의 상정마저 저지하겠다는 목표를 분명히 한 만큼 자한당이 필리버스터를 시작하기 전에 선거법 개정안을 상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필리버스터의 대상이 되지 않는 예산안을 최대한 빨리 상정시키면서 선거법 개정안의 수정안도 상정해야 자한당의 방해를 피할 수 있다. 그러려면 예산안 상정 이전까지 선거법에 대한 합의를 끝내야 한다. 이번 회기의 마지막 날인 10일까지 기다리거나 그 뒤에 있을 임시국회를 기다릴 새가 없다.

현재 선거법은 ‘250+50’안을 놓고 정의당을 설득하는 중이다. 나경원의 “199개 법안 모두 필리버스터!!” 선언은 주저하고 있는 정의당으로 하여금 예산안 처리 이전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빨리 합의를 서두르라고 압박하는 셈이 된 것이다. 

또한 12월 3일 부의될 예정인 공수처법도 당초에는 자한당과 협상하는 모양새를 더 갖춰볼 생각이었으나 예산안·선거법과 함께 상정하여 나경원이 생색내기용으로 필리버스터에서 제외시킨 민식이법과 함께 처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거법과 공수처법은 이번 회기에서 필리버스터로 통과가 저지돼도 다음 회기에 자동적으로 최우선처리하게 된다.

다시 얘기하지만 진짜로 저지하고 싶은 유치원 3법+α만 필리버스터를 진행했으면 이렇게 욕을 먹을 일도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했어도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동안 의장이 선거법 개정안과 공수처법안을 상정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호미로 막을 일 가래로 막는다고, 괜히 유치원 3법으로 욕먹기 싫다고 더 큰 욕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보너스로 민주당 대신 나서서 선거법 수정안 합의까지 압박하고 공수처법 처리도 가속화시키는 선물까지 던져준 셈이다.

나경원, 아무래도 바보 아닌가 싶다. 민주당으로서야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지만.